처음 1차 CoP(Community of Practice) 멤버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스친 생각 “와, 애 둘 놓고 혼자 가는 여행이다. 좋다” 하지만 그 이후 깊이 자리 잡은 생각은 “과연 좋은 걸까?” 잘 모르는 사람들과 3박 5일을 함께 한다는 것 말이다. 기쁜 마음으로 친한 친구들과 가도 틀어지는 게 여행이다. 거기다 모두에게는 두 개의 인격체가 있지 않은가. 회사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을 장착해야 하는 것이다. ‘연차도, 나이도 모르고 채팅창에서 본 이름이 전부인 선후배들인데 어떻게 알아보고 인사해야하나’ 그런 사소한 고민까지도 스쳐 지나갔다. 마냥 설레는 마음이기보다는 여러 복잡한 감정들을 안은 채 공항에 도착했다. 

“따뜻한 시선과 관심
이런 게 ‘환대’구나”

출발 전, 나의 걱정들이 무색하게도 공항에서 처음 맞이한 선배님들은 “조태임 기자, 방송 잘 듣고 있어요.” “CoP 통해 이렇게 만나니 좋네” 라며 너무나 반갑고 환한 얼굴로 맞이해 주셨다. ‘환대’,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질투와 시기가 넘쳐나는 요즘 사회에서 ‘나’는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가리기에 익숙했고, 그래서 어딘가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도 잘 못했다.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외면이 익숙했다. 그런 일상만 지내다가 맞이한 CoP멤버들의 따뜻한 시선과 관심에 이런 게 ‘환대’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 나트랑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동남아의 기운, 밤늦게 도착했기에 대낮처럼 뜨겁지는 않았지만 더운 공기에 부는 바람. 한국에서 입고 간 경량 패딩과 남방을 바로 벗어야 했다. “아,  내일부터는 진짜 베트남을 즐겨야지”

어색함을 빨리 없애기 위한
세밀한 장치들

지난밤 제대로 통성명도 못한 채 바삐 숙소에 올라갔던 터라(필리핀 시간으로 자정, 한국시간으로 이미 새벽 2시를 지난 시간 숙소에 도착했다) 서로의 얼굴도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둘째 날을 맞이했다. 그런데 일정도 참 얄궂다.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 호핑투어(낚시, 스노쿨링)가 바로 잡혀있었다. 하지만 민망함도 잠시, 20여 분을 이동해 도착한 선착장에는 탁 트인 바다와 뜨거운 햇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로소 ‘여행을 왔구나’ 느꼈던 순간이다. 40인승 보트를 타고 호핑투어가 이뤄지는 지점까지 가는데 보트 탑승 자체도 신나는 일이지만, 타는 동안이 더 좋다. 처음에는 주저 없이 내달리는 보트의 속도감이 해방감을 느끼게 했고, 그 뒤로는 바다를 가를 때마다 튀어 오르는 물결에 환호했다. 호핑투어에서는 낚시, 스노쿨링, 다이빙 등을 체험했다. 이후에는 “열심히 일한 당신 놀아라”라는 콘셉트대로 호핑투어의 진행자들은 춤과 음악으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열심히 노는 사람이 잘 노는 거지’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놀았는데... 그때 이후부터 우리의 어색함도 사라졌던 것 같다. “어색함을 빨리 없애라고 호핑투어 일정을 둘째 날 넣어놨구나” 


그리고 그날 저녁, 다같이 모여 저녁을 먹으면서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눴는데 그 때를 기점으로 선배들과 후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또 평소 회사 사람들과는 잘 나누지 못했던 취향이나 취미, 생각, 지혜 등을 공유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런 많은 얘기들이 오가는 속에 한편으로는 우리가 ‘CBS'라는 한 울타리 아래에 있지만, '서로를 너무 몰랐구나' 반성도 하게 됐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들

셋째 날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전날부터 ‘뭐 하지?’ 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는데 아침부터 옷은 뭐 입지, 오늘 식당은 어디 가지? 등등 오랜만에 주어진 선택권 하나하나에 설렜다. 불과 두 달 전 가족들과 여름휴가로 나트랑을 갔다 왔는데, 그때는 온전히 아이들을 위한 동선이었다. 베트남 날씨가 워낙 더운 탓에 아이들과 나트랑 시내 구경을 할 수가 없었고, 현지 냄새가 물씬 나는 낡은 맛 집도, 그렇게 손맛이 좋고 싸다는 마사지 샵도 못 가봤다. 그런데 내게 자유시간이 주어지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 이 때다” 싶어서 ‘맛 집, 카페, 기념품 상점, 마사지 샵’ 들을 미리 찾아놓고 부지런히 다녔다. 애들 눈치 안 봐도 되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원래 좋아하는 건 이런 거지?, 잃어버린 ‘나’를 잠시나마 찾은 시간이기도 했다. 


베트남을 다니다보면 왜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을 많이 찾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우선은 무엇보다 ‘싸다’, 마사지는 한국의 절반 가격이고 손맛도 좋다.  그리고 ‘맛있다’, 이미 쌀국수와 분짜 같은 베트남 음식은 익숙하지만, 베트남 현지에서 먹는 맛은 또 다르다. 그런데 가격도 싸다. 마지막으로 친절하다. 내가 접한 베트남 사람들은 대체로 ‘선했다’.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물건을 사지 않고 나가는 나에게도 활짝 웃어주는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그날 밤 ‘벌써 내일이 출발이네’ 처음에는 아이들 두고 떠나온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제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거야?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다고?”

모든 일은 시작과 끝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1차 CoP는 말 그대로 ‘끝이 또 다른 시작이었다’. 마지막 날 나트랑 유적지 방문과 현지 시장 쇼핑, 나트랑 야시장 투어, 단체 마사지까지 받고 우리는 서울로 가기 위해 나트랑 공항으로 향했다. 새벽 2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이미 자정이 다 된 시간, ‘이제는 정말 서울로 가는구나’ 라는 마음에 다들 말 수가 급격히 줄었던 듯하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치고 출국을 위한 탑승 수속을 모두 마치고 출국장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여행 얘기를 나누며 일정을 정리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때부터다. 비행기 출발 시간인 새벽 2시20분이 지나도록 탑승장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애꿎은 베트남 직원들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잠시만 대기해달라는 말뿐. 그러다 전해진 청천벽력같은 소식. 우리가 뜰 비행기가 유리창이 깨져 이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대체할 비행기도 없어서 꼬박 한국에서 보내는 비행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시곗바늘은 새벽 3시를 향해 가는 데 말이다. 14시간 뒤인..다음날 오후 4시에나 비행기가 뜰 것 같다는데, .‘그럼 애들은 어쩌지? 회사 출근은 어쩌지?’ 그때부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뉴스에서만 보던 상황, 공항 노숙을 하게 됐네. 한국 승객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항공사 측은 잠시 뒤 근처 숙소들을 예약하고 있다며 거기에서 쉬었다가 출발 시간 공지가 가면 그때 다시 공항으로 와달라고 했다. 내일 갈 수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 짐을 찾아 공항을 나갔다가 다시 수속하는 번거로운 절차는 덤일뿐, 공항 1층에 나가니 숙소로 실어다줄 차를 기다리는 긴 줄이 있었다. 다들 큰 캐리어 한 두 개에 배낭을 메고 있으니 피난 줄이 따로 없다. 이미 새벽 4시가 지난 시간, 저 멀리 동이 트기 시작했다. 결국 새벽 5시를 넘겨 숙소에 도착했고 몇 시간 잤을까, 잠깐의 휴식 이후 7시간 만에 우리는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불과 몇 시간 밖에 안 된 일이지만, ‘이번 일은 아마 평생 회자 될 것“이란 얘기들을 나누며 이미 어젯밤의 시련은 또 다른 무용담이 돼 있었다. 우리는 또다시 나트랑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번엔 갈 수 있겠지?”라는 불안감과 함께 “이제 정말 한국에 간다”라는 홀가분함 두 마음이 공존했다.

“CoP의 취지가 뭔지
제대로 느낀 여행이었어요”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3박 5일 일정은 의도치 않게 4박 6일이 됐고 하루 길어난 기간만큼 우리는 끈끈해져 있었다. 위기를 함께 겪고 이겨내면 돈독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여행 후 추억을 나누는 채팅방에서는 알 수 없는 동지애가 흐르고 있었다. 여행에 다녀온 후 다들 한마디씩 묻는다 “어땠어?” 그 질문에 “CoP의 취지가 뭔지 제대로 느낀 여행이었어요. 평소 잘 모르던 선후배들 알게 된 거, 그걸 제대로 느낀 여행이었어요.”라고 말한다. 교과서적인 답변 같아서 다들 웃지만, 정말 정말 그랬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선후배들에게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위기 속에서 내 한 몸을 챙기기보다 ‘서로’를 챙기고 배려하고 걱정해주는 모습. 다시 생각해봐도 감사한 경험이다.    

“여행의 끝이 진짜 시작이었다”

조태임 보도국 뉴스제작부

처음 1차 CoP(Community of Practice) 멤버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스친 생각 “와, 애 둘 놓고 혼자 가는 여행이다. 좋다” 하지만 그 이후 깊이 자리 잡은 생각은 “과연 좋은 걸까? ” 잘 모르는 사람들과 3박 5일을 함께 한다는 것 말이다. 기쁜 마음으로 친한 친구들과 가도 틀어지는 게 여행이다. 거기다 모두에게는 두 개의 인격체가 있지 않은가. 회사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 여행이라고는 하지만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을 장착해야 하는 것이다. ‘연차도, 나이도 모르고 채팅창에서 본 이름이 전부인 선후배들인데 어떻게 알아보고 인사해야하나’ 그런 사소한 고민까지도 스쳐 지나갔다. 마냥 설레는 마음이기보다는 여러 복잡한 감정들을 안은 채 공항에 도착했다.

“따뜻한 시선과 관심..이런 게 ‘환대’구나”

출발 전, 나의 걱정들이 무색하게도 공항에서 처음 맞이한 선배님들은 “조태임 기자, 방송 잘 듣고 있어요.” “CoP 통해 이렇게 만나니 좋네” 라며 너무나 반갑고 환한 얼굴로 맞이해 주셨다. ‘환대’,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질투와 시기가 넘쳐나는 요즘 사회에서 ‘나’는 존재를 드러내기보다 가리기에 익숙했고, 그래서 어딘가에 속하고 싶다는 생각도 잘 못했다. 적당한 거리감과 적당한 외면이 익숙했다. 그런 일상만 지내다가 맞이한 CoP 멤버들의 따뜻한 시선과 관심에 이런 게 ‘환대’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행. 나트랑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동남아의 기운, 밤늦게 도착했기에 대낮처럼 뜨겁지는 않았지만 더운 공기에 부는 바람. 한국에서 입고 간 경량 패딩과 남방을 바로 벗어야 했다. “아,  내일부터는 진짜 베트남을 즐겨야지”

어색함을 빨리 없애기 위한 세밀한 장치들

지난밤 제대로 통성명도 못한 채 바삐 숙소에 올라갔던 터라(필리핀 시간으로 자정, 한국시간으로 이미 새벽 2시를 지난 시간 숙소에 도착했다) 서로의 얼굴도 익숙지 않은 상태에서 둘째 날을 맞이했다. 그런데 일정도 참 얄궂다.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 호핑투어(낚시, 스노쿨링)가 바로 잡혀있었다. 하지만 민망함도 잠시, 20여 분을 이동해 도착한 선착장에는 탁 트인 바다와 뜨거운 햇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로소 ‘여행을 왔구나’ 느꼈던 순간이다. 40인승 보트를 타고 호핑투어가 이뤄지는 지점까지 가는데 보트 탑승 자체도 신나는 일이지만, 타는 동안이 더 좋다. 처음에는 주저 없이 내달리는 보트의 속도감이 해방감을 느끼게 했고, 그 뒤로는 바다를 가를 때마다 튀어 오르는 물결에 환호했다. 호핑투어에서는 낚시, 스노쿨링, 다이빙 등을 체험했다. 이후에는 “열심히 일한 당신 놀아라”라는 콘셉트대로 호핑투어의 진행자들은 춤과 음악으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열심히 노는 사람이 잘 노는 거지’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놀았는데... 그때 이후부터 우리의 어색함도 사라졌던 것 같다. “어색함을 빨리 없애라고 호핑투어 일정을 둘째 날 넣어놨구나” 


그리고 그날 저녁, 다같이 모여 저녁을 먹으면서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눴는데 그 때를 기점으로 선배들과 후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또 평소 회사 사람들과는 잘 나누지 못했던 취향이나 취미, 생각, 지혜 등을 공유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런 많은 얘기들이 오가는 속에 한편으로는 우리가 ‘CBS'라는 한 울타리 아래에 있지만, '서로를 너무 몰랐구나' 반성도 하게 됐다.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들

셋째 날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전날부터 ‘뭐 하지?’라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는데 아침부터 옷은 뭐 입지, 오늘 식당은 어디 가지? 등등 오랜만에 주어진 선택권 하나하나에 설렜다. 불과 두 달 전 가족들과 여름휴가로 나트랑을 갔다 왔는데, 그때는 온전히 아이들을 위한 동선이었다. 베트남 날씨가 워낙 더운 탓에 아이들과 나트랑 시내 구경을 할 수가 없었고, 현지 냄새가 물씬 나는 낡은 맛 집도, 그렇게 손맛이 좋고 싸다는 마사지 샵도 못 가봤다. 그런데 내게 자유시간이 주어지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래, 이 때다” 싶어서 ‘맛 집, 카페, 기념품 상점, 마사지 샵’ 들을 미리 찾아놓고 부지런히 다녔다. 애들 눈치 안 봐도 되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원래 좋아하는 건 이런 거지?, 잃어버린 ‘나’를 잠시나마 찾은 시간이기도 했다. 


베트남을 다니다보면 왜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을 많이 찾는지 자연스레 알게 된다. 우선은 무엇보다 ‘싸다’, 마사지는 한국의 절반 가격이고 손맛도 좋다.  그리고 ‘맛있다’, 이미 쌀국수와 분짜 같은 베트남 음식은 익숙하지만, 베트남 현지에서 먹는 맛은 또 다르다. 그런데 가격도 싸다. 마지막으로 친절하다. 내가 접한 베트남 사람들은 대체로 ‘선했다’. 일반화 할 수는 없지만, 물건을 사지 않고 나가는 나에게도 활짝 웃어주는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그날 밤 ‘벌써 내일이 출발이네’ 처음에는 아이들 두고 떠나온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제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 거야?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다고?”

모든 일은 시작과 끝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1차 CoP는 말 그대로 ‘끝이 또 다른 시작이었다’. 마지막 날 나트랑 유적지 방문과 현지 시장 쇼핑, 나트랑 야시장 투어, 단체 마사지까지 받고 우리는 서울로 가기 위해 나트랑 공항으로 향했다. 새벽 2시 비행기였기 때문에 이미 자정이 다 된 시간, ‘이제는 정말 서울로 가는구나’ 라는 마음에 다들 말 수가 급격히 줄었던 듯하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치고 출국을 위한 탑승 수속을 모두 마치고 출국장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여행 얘기를 나누며 일정을 정리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때부터다. 비행기 출발 시간인 새벽 2시20분이 지나도록 탑승장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다. 애꿎은 베트남 직원들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잠시만 대기해달라는 말뿐. 그러다 전해진 청천벽력같은 소식. 우리가 뜰 비행기가 유리창이 깨져 이륙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 대체할 비행기도 없어서 꼬박 한국에서 보내는 비행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시곗바늘은 새벽 3시를 향해 가는 데 말이다. 14시간 뒤인..다음날 오후 4시에나 비행기가 뜰 것 같다는데, .‘그럼 애들은 어쩌지? 회사 출근은 어쩌지?’ 그때부터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뉴스에서만 보던 상황, 공항 노숙을 하게 됐네. 한국 승객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항공사 측은 잠시 뒤 근처 숙소들을 예약하고 있다며 거기에서 쉬었다가 출발 시간 공지가 가면 그때 다시 공항으로 와달라고 했다. 내일 갈 수 있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황에 짐을 찾아 공항을 나갔다가 다시 수속하는 번거로운 절차는 덤일뿐, 공항 1층에 나가니 숙소로 실어다줄 차를 기다리는 긴 줄이 있었다. 다들 큰 캐리어 한 두 개에 배낭을 메고 있으니 피난 줄이 따로 없다. 이미 새벽 4시가 지난 시간, 저 멀리 동이 트기 시작했다. 결국 새벽 5시를 넘겨 숙소에 도착했고 몇 시간 잤을까, 잠깐의 휴식 이후 7시간 만에 우리는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불과 몇 시간 밖에 안 된 일이지만,  ‘이번 일은 아마 평생 회자 될 것“이란 얘기들을 나누며 이미 어젯밤의 시련은 또 다른 무용담이 돼 있었다. 우리는 또다시 나트랑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이번엔 갈 수 있겠지?”라는 불안감과 함께 “이제 정말 한국에 간다”라는 홀가분함 두 마음이 공존했다.

“CoP의 취지가 뭔지 제대로 느낀 여행이었어요”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3박 5일 일정은 의도치 않게 4박 6일이 됐고 하루 길어난 기간만큼 우리는 끈끈해져 있었다. 위기를 함께 겪고 이겨내면 돈독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여행 후 추억을 나누는 채팅방에서는 알 수 없는 동지애가 흐르고 있었다. 여행에 다녀온 후 다들 한마디씩 묻는다 “어땠어?” 그 질문에 “CoP의 취지가 뭔지 제대로 느낀 여행이었어요. 평소 잘 모르던 선후배들 알게 된 거, 그걸 제대로 느낀 여행이었어요.”라고 말한다. 교과서적인 답변 같아서 다들 웃지만, 정말 정말 그랬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 선후배들에게 많이 배운 시간이었다. 위기 속에서 내 한 몸을 챙기기보다 ‘서로’를 챙기고 배려하고 걱정해주는 모습. 다시 생각해봐도 감사한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