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기자

탈수습기

본사 기자 나채영, 박인, 주보배

 광주 기자 김수진  /  대구 기자 정진원

4월 8일. 1월부터 시작했던 석 달 동안의 수습이 끝났습니다. 40기 기자 5명의 수습 기간을 담은 92일의 기록을 전달합니다.



“이게…. 되네?”

형사과장한테 벌써 6번째 전화다.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다시 통화 연결음이 들린다. 전화기 너머 화를 내는 경찰의 목소리에 나는 잽싸게 대답한다. “과장님~ CBS 노컷뉴스 기자 김수진입니다.” “아, 김 기자! 우리 좋은 관계를 왜 자꾸 망치려 해. 나 차단한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묻는 모습에 결국 경찰이 먼저 웃었다. “아직도 경찰서 1층에 서 있으면 올라와서 얘기해” 백기를 든 과장의 방에서 또 믹스커피 한잔 두고 입씨름. 이렇게 일면식도 없는 내 또래의 마약 투약 사건을 알아냈다.


“선배…. 일단 더 찾아보겠습니다”

광주 평동산업단지. 외국인 노동자의 인터뷰를 녹음해야 한다. 근데 여기… 아무도 없다. 일단 택시를 잡고 기사님한테 외국인이 모여 사는 곳을 가달라고 부탁했다. 보이는 외국인은 모두 붙잡았는데… 아! 한국어를 못한다. 벵골어, 태국어, 필리핀어. 구글 번역기로 하는 7번째 대화 끝에 겨우 우리말을 하는 A양을 찾았다. ‘진짜 하느님 살아계시나?’ CBS 들어와서(?) 종종 느낀다. 오늘도 이렇게 리포트를 만들었다.

기사가 나가지 않아도 집요하게 파고든 3개월. 하루살이처럼 지낸 100일. 되든 안 되든 부딪쳤다. 매일 아침 생각하고 출근한다. ‘오늘도 또 현장을 가면… 어떻게든 된다! 일단 시작하자’


“기자가 왜 되고 싶냐고.”

“나가세요~ 말하기 싫어요~”

하루 종일 만난 경찰, 민원인, 시민 등은 대부분 냉정했다. 호의적인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를 달가워하지 않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내가 왜 경찰서에서, 거리에서 이 시간을 겪고 있는지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어떤 기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야 했다.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서,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해서로 결론 낼 게 아니었다. 게다가 펜의 힘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무서웠다. 같은 시민단체 집회를 보더라도 어떤 시각과 목소리를 담느냐에 따라 다른 기사가 나가는 것을 봤다.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하고 기록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부딪혀야 했다.

석 달은 금방 지나갔다. 꽉꽉 채운 석 달을 보내면서 그래도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 결론지은 게 있다면 기사에 세상을 바꿀 선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가달라는, 말하기 싫다는 표면에 가려진 이유를 듣고 사실을 여러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와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수습기자가 됐다.”

첫날, 다짜고짜 마와리를 돌라는 선배의 말에 문 앞에서 연신 “CBS 박인입니다”를 외쳤다. 코로나에 걸려 출근하지 못한 사흘 동안 동기들에게 미리 전수받은 팁으로 가방에 박카스 20개를 메고 말이다. 음료수는 아무도 받지 않았다. 선배는 인사하러 갔냐며 호통쳤다. 사건을 주지 않는데 사건을 얻지 못했다고 매시간 보고해야 하는 현실이 버거웠다. 어디에도 내 편이 없는 듯한 버려진 느낌은 처음이었다. 날마다 울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만두려고 마음먹은 날마다 하늘이 날 도왔다. 개인정보라며 절대 자세히 알려주지 않던 소방관이 고독사로 사망한 사람의 주소를 알려줬다. 그토록 차갑던 경찰이 내 억지웃음이 안쓰럽다며 사건을 알려줬다. 수십 명에게 거절당하고 패닉에 빠졌을 때 한 시민이 먼저 다가와 인터뷰를 자원했다. 이상하게도 정말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주변에서 다가왔다. 남들이 들으면 의심할 정도로 의아한 타이밍이었다. 그만두지 말라는 신의 뜻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들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겪고 적응 단계의 지금, 수습을 벗어난다. 이제는 사건을 알려주는 경찰도 있고, 시민에게 다가가는 게 두렵지도 않다. 기자회견이나 집회에 가서 녹음, 사진, 워딩을 동시에 하는 것도 익숙하다. 무엇보다 웬만한 일로는 무안함을 느끼지도 않는 ‘강철멘탈’도 얻었다. 물론 절대적으로 매우 부족하지만, 수습 첫날의 나보다는 훨씬 성장했다. 하늘이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도운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확실한 건 나라는 사람이 CBS의 기자로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자가 나를 취재하려 했다.”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 피습 사건 때였다. 패딩을 입고 가방을 멘 내가 도무지 기자처럼 안 보였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에게 미디어에 비친 기자의 모습은 없었다.


3개월 동안 수습기자 생활을 하면서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고, 소방관과 싸우기도 했다. 매일 취재 과정에서, 그리고 선배들로부터 쏟아지는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으면서 기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으로 단독을 달고 기사가 나갔을 때 알게 됐다. 기자는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걸 들춰내야 한다.


뇌 병변을 가진 아이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가 있었다. 기사가 나가자, 유가족들이 취재원을 알아야겠다며 연락이 왔고, 경찰서에 민원도 넣었다. 결국 기사가 내려가고 상황이 일단락됐다. 지금은 내가 취재한 사실이 누군가에게 피해나 상처가 될 거란 걸 알고도 취재한다. 기자에 한 발 더 다가간 느낌이다.



“나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지옥철 타고 출근하는 게 소원이었어요”

접이식 휠체어에 누운 영애 씨는 이 말을 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뇌병변 장애인인 그는 서울시가 공공일자리 사업 예산을 폐지하면서 처음 가진 일자리를 잃었다. 영애 씨를 만나고 난 뒤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게 당연했던 내 삶의 테두리가 조금은 넓어졌다.


“설날에 뭐 하냐고? 그냥 혼자 있죠”

설 연휴가 시작된 지난 2월 9일 박상봉 씨는 아침부터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그는 쪽방이 빽빽이 모인 ‘벌집촌’에 산다. 며칠 전 이웃 주민이 죽어 있는 걸 발견하고 112에 직접 신고한 것도 그였다. 가족 없이 혼자 지낸 지 하도 오래돼서 이제 외로움에 익숙해졌다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자님, 다음에 또 와요. 같이 밥 먹게” 명절이면 가족과 함께 복작이는 연휴를 보내는 게 당연했던 내 삶의 테두리는 또다시 꾸물꾸물 넓어졌다.

이렇게 지난 3개월. 내 세상은 조금씩 넓어졌다. 앞으로도 좁아터진 내 세상이 조금씩 넓어질 수 있도록 열심히 뛰어다니고 싶다.

신입기자 탈수습기

본사 기자 나채영, 박인, 주보배  /  광주 기자 김수진  /   대구 기자 정진원

4월 8일. 1월부터 시작했던 석 달 동안의 수습이 끝났습니다. 40기 기자 5명의 수습 기간을 담은 92일의 기록을 전달합니다.


“이게…. 되네?”

형사과장한테 벌써 6번째 전화다.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다시 통화 연결음이 들린다. 전화기 너머 화를 내는 경찰의 목소리에 나는 잽싸게 대답한다. “과장님~ CBS 노컷뉴스 기자 김수진입니다.” “아, 김 기자! 우리 좋은 관계를 왜 자꾸 망치려 해. 나 차단한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묻는 모습에 결국 경찰이 먼저 웃었다. “아직도 경찰서 1층에 서 있으면 올라와서 얘기해” 백기를 든 과장의 방에서 또 믹스커피 한잔 두고 입씨름. 이렇게 일면식도 없는 내 또래의 마약 투약 사건을 알아냈다.


“선배…. 일단 더 찾아보겠습니다”

광주 평동산업단지. 외국인 노동자의 인터뷰를 녹음해야 한다. 근데 여기… 아무도 없다. 일단 택시를 잡고 기사님한테 외국인이 모여 사는 곳을 가달라고 부탁했다. 보이는 외국인은 모두 붙잡았는데… 아! 한국어를 못한다. 벵골어, 태국어, 필리핀어. 구글 번역기로 하는 7번째 대화 끝에 겨우 우리말을 하는 A양을 찾았다. ‘진짜 하느님 살아계시나?’ CBS 들어와서(?) 종종 느낀다. 오늘도 이렇게 리포트를 만들었다.

기사가 나가지 않아도 집요하게 파고든 3개월. 하루살이처럼 지낸 100일. 되든 안 되든 부딪쳤다. 매일 아침 생각하고 출근한다. ‘오늘도 또 현장을 가면… 어떻게든 된다! 일단 시작하자’







“기자가 왜 되고 싶냐고.”

“나가세요~ 말하기 싫어요~”

하루 종일 만난 경찰, 민원인, 시민 등은 대부분 냉정했다. 호의적인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를 달가워하지 않은 사람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더 내가 왜 경찰서에서, 거리에서 이 시간을 겪고 있는지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어떤 기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야 했다.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서,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해서로 결론 낼 게 아니었다. 게다가 펜의 힘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무서웠다. 같은 시민단체 집회를 보더라도 어떤 시각과 목소리를 담느냐에 따라 다른 기사가 나가는 것을 봤다. 사실을 확인하고, 검증하고 기록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부딪혀야 했다.

석 달은 금방 지나갔다. 꽉꽉 채운 석 달을 보내면서 그래도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 결론지은 게 있다면 기사에 세상을 바꿀 선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믿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가달라는, 말하기 싫다는 표면에 가려진 이유를 듣고 사실을 여러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마와리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수습기자가 됐다.”

첫날, 다짜고짜 마와리를 돌라는 선배의 말에 문 앞에서 연신 “CBS 박인입니다”를 외쳤다. 코로나에 걸려 출근하지 못한 사흘 동안 동기들에게 미리 전수받은 팁으로 가방에 박카스 20개를 메고 말이다. 음료수는 아무도 받지 않았다. 선배는 인사하러 갔냐며 호통쳤다. 사건을 주지 않는데 사건을 얻지 못했다고 매시간 보고해야 하는 현실이 버거웠다. 어디에도 내 편이 없는 듯한 버려진 느낌은 처음이었다. 날마다 울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만두려고 마음먹은 날마다 하늘이 날 도왔다. 개인정보라며 절대 자세히 알려주지 않던 소방관이 고독사로 사망한 사람의 주소를 알려줬다. 그토록 차갑던 경찰이 내 억지웃음이 안쓰럽다며 사건을 알려줬다. 수십 명에게 거절당하고 패닉에 빠졌을 때 한 시민이 먼저 다가와 인터뷰를 자원했다. 이상하게도 정말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주변에서 다가왔다. 남들이 들으면 의심할 정도로 의아한 타이밍이었다. 그만두지 말라는 신의 뜻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들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겪고 적응 단계의 지금, 수습을 벗어난다. 이제는 사건을 알려주는 경찰도 있고, 시민에게 다가가는 게 두렵지도 않다. 기자회견이나 집회에 가서 녹음, 사진, 워딩을 동시에 하는 것도 익숙하다. 무엇보다 웬만한 일로는 무안함을 느끼지도 않는 ‘강철멘탈’도 얻었다. 물론 절대적으로 매우 부족하지만, 수습 첫날의 나보다는 훨씬 성장했다. 하늘이 내가 포기하지 않도록 도운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확실한 건 나라는 사람이 CBS의 기자로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기자가 나를 취재하려 했다.”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 피습 사건 때였다. 패딩을 입고 가방을 멘 내가 도무지 기자처럼 안 보였나 보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에게 미디어에 비친 기자의 모습은 없었다.


3개월 동안 수습기자 생활을 하면서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고, 소방관과 싸우기도 했다. 매일 취재 과정에서, 그리고 선배들로부터 쏟아지는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으면서 기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으로 단독을 달고 기사가 나갔을 때 알게 됐다. 기자는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걸 들춰내야 한다.


뇌 병변을 가진 아이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가 있었다. 기사가 나가자, 유가족들이 취재원을 알아야겠다며 연락이 왔고, 경찰서에 민원도 넣었다. 결국 기사가 내려가고 상황이 일단락됐다. 지금은 내가 취재한 사실이 누군가에게 피해나 상처가 될 거란 걸 알고도 취재한다. 기자에 한 발 더 다가간 느낌이다.


“나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지옥철 타고 출근하는 게 소원이었어요”

접이식 휠체어에 누운 영애 씨는 이 말을 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뇌병변 장애인인 그는 서울시가 공공일자리 사업 예산을 폐지하면서 처음 가진 일자리를 잃었다. 영애 씨를 만나고 난 뒤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게 당연했던 내 삶의 테두리가 조금은 넓어졌다.


“설날에 뭐 하냐고? 그냥 혼자 있죠”

설 연휴가 시작된 지난 2월 9일 박상봉 씨는 아침부터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그는 쪽방이 빽빽이 모인 ‘벌집촌’에 산다. 며칠 전 이웃 주민이 죽어 있는 걸 발견하고 112에 직접 신고한 것도 그였다. 가족 없이 혼자 지낸 지 하도 오래돼서 이제 외로움에 익숙해졌다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자님, 다음에 또 와요. 같이 밥 먹게” 명절이면 가족과 함께 복작이는 연휴를 보내는 게 당연했던 내 삶의 테두리는 또다시 꾸물꾸물 넓어졌다.

이렇게 지난 3개월. 내 세상은 조금씩 넓어졌다. 앞으로도 좁아터진 내 세상이 조금씩 넓어질 수 있도록 열심히 뛰어다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