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는 그와 함께 시작됐다
특집 다큐멘터리
<디캠프>

CBS 설립의 주역,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이자

언론인을 조명하다

김동민 TV제작국 김동민PD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널리 알린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한국을 위해 몸 바치고 사후에도 한국 땅에 안장돼 기억되어 온 인물들이다. 이들처럼 한국을 사랑했지만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외국인이 있다. CBS의 오늘을 있게 한 선교사이자 언론인 E. 오토 디캠프(1911~2001, 이하 ‘디캠프’)의 일대기 다큐멘터리 <디캠프> 제작은 그야말로 ‘우연 같은 필연’에 의해 시작됐다.

종로 거리에서 길을 찾던
후손들이 목동으로 안내되다

지난 해 9월 종로5가 한 복판에서 헤매고 있던 한 무리의 미국인들에게 호기심 많은 목사 한 분이 다가갔고, 놀랍게도 그들은 CBS 초대 사장 오토 디캠프의 후손들이었다. 창사 70주년을 맞은 CBS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은 목동으로 안내됐고, 종로에 있는 줄 알고 찾아 헤매던 CBS 사옥을 48년 만에 방문했다. 차남 짐 디캠프 목사를 창사 70주년 기념식에 초대했고, 계엄의 밤이 막 지난 12월 4일 입국한 그와 함께 오토 디캠프를 기억하는 다큐멘터리의 촬영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시작됐다.

2024년 9월, CBS 사옥을 방문한 오토 디캠프의 후손들

서대문형무소에서의 다큐멘터리 촬영 (2024년 12월)

일제의 감옥, 종로의 방송국,
4,19 혁명의 거리, 
그리고 다시 미국...
파란만장한 삶

미국인 내한 선교사의 아들로 1911년 서울 종로구 홍파동에서 태어난 디캠프는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38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 신분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해지던 1941년 1월, 디캠프는 한국인 신자 집에 설치된 가정 신사(神社)인 가미다나(神棚) 철거를 감행하고 체포돼 사상범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서대문형무소 앞에 선 디캠프 (1948년)

디캠프는 법정에서 “한국인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내가 직접 철거했다”고 진술했고, 미국인 선교사가 구속된 사태에 미 대사관과 국무부는 분주하게 대응했다. 1941년 7월 일제 하 경성복심법원은 ‘10개월의 노동 징역형,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디캠프는 미국으로 추방됐다.


자신에게 고난을 안겨준 땅이었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는, ‘어떻게 하면 빨리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 북장로교 선교부에 끊임없이 질문했고 미 육군 군목으로 3년간 복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8년, 미국교회와 한국기독교연합회(NCCK)가 함께 라디오 방송국을 세우는 일의 책임자로 7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한국전쟁 발발로 방송장비가 일본 고베항의 창고에 묶이고 전쟁 난민 구호에 나서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54년 12월 15일 오후 6시, 마침내 종로2가 기독교서회 5층 스튜디오에서 호출부호 HLKY,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 CBS의 첫 전파가 쏘아 올려졌다.

 초대 CBS 국장 오토 디캠프 (1950년대)

 CBS 인기 드라마 ‘이 생명 다 하도록’ 녹음 현장 (1957년)

기독교방송 CBS의 초대 국장(현 사장) 디캠프는 “듣는 이가 없다면 천사가 마이크를 잡아도 헛되다”며 주파수가 교회 밖에 있는 90%의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도달하기 원했다. 당시 최신식 장비인 LP판을 미국에서 들여와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수정탑>과 <이 생명 다하도록> 같은 드라마 히트작을 연달아 선보였고 CBS 청취자의 70%는 비기독교인이었다. 국영방송 KBS와 경쟁하며 195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를 연 것이다.

 4.19 혁명 시위 현장을 생중계하는 CBS 방송부 (1960년)

 4.19 특집보도로 정부 표창장을 받는 디캠프 국장 (1960년)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 시기 CBS는 종로2가 사옥 옥상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며 생생한 현장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다. 혁명 기간 동안 진실 보도에 목말랐던 시민들은 정부의 입장만을 대변하던 국영방송 대신 CBS에 라디오 다이얼을 맞췄다. 정규편성을 중단하고 전 직원을 4.19 특집보도 제작에 동원했고 디캠프 국장 이하 모든 간부가 숙직을 하며 뉴스 제작을 지휘했다. 후에 디캠프는 “4월 혁명을 계기로 CBS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사람들은 기독교방송이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회고했다.

“내가 할 일을 다 했을 뿐”

1968년, 외국인이 방송사 대표를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박정희 정부의 종용에 디캠프는 국장에서 해임됐다. 정부 입장에서 ‘할 말은 하는’ 미국인 디캠프가 편할 리 없었다. 디캠프가 국장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진실을 추구하는 기독교 저널리즘‘의 원칙을 세운 CBS는 1970년대 이후 ‘종로5가 기독교회관’으로 상징되던 민주화, 인권 운동의 흐름에 함께 하며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진실 보도의 전통을 이어간다.


임기 정년을 마친 디캠프는 1976년 5월, 김포공항에서 수백 명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49년을 살아온 한국과 이별한다. 그날 아버지에게 심경을 물었던 아들 짐 디캠프는 나지막한 그의 대답을 아직도 기억한다. “짐, 나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란다.” 한국에 남긴 마지막 고별사였다.

             

다큐멘터리 <디캠프>는 10명의 미디어학자, 교회사학자의 자문을 얻었고, 특히 1930년대부터 작성되어 수백 장에 달하는 디캠프의 서신과 리포트, 미국 국무부 자료와 신문 잡지 기사, 1960년대 CBS 사업보고서 등 자료 확보로 사실성과 신뢰도를 높였다. <디캠프>는 단순히 한 개인과 방송국의 역사가 아닌 한국 선교역사, 방송역사, 사회운동사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하 교회와 선교사들의 대응, 해방 후 한국 방송 현실과 방송선교에 대한 교회의 도전, 민주화 운동에 나선 교회의 움직임과 기독교방송의 관계 등을 담아냈다.

<김현정의뉴스쇼> 제작현장을 찾은 디캠프 후손들 (2024년 12월)

촬영 기간 동안 짐 디캠프 목사의 숙소가 있던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이어졌다. 민주주의를 위한 몸짓을 40여 년 만에 직접 목도하며, 1950~70년대 정치적 격동 속에서 CBS를 이끌어가던 아버지 오토 디캠프의 결연한 표정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다큐멘터리 <디캠프> 영상보기

CBS는 그와 함께 시작됐다
특집 다큐멘터리 <디캠프>

CBS 설립의 주역,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이자 언론인을 조명하다

김동민 TV제작국 PD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널리 알린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한국을 위해 몸 바치고 사후에도 한국 땅에 안장돼 기억되어 온 인물들이다. 이들처럼 한국을 사랑했지만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외국인이 있다. CBS의 오늘을 있게 한 선교사이자 언론인 E. 오토 디캠프(1911~2001, 이하 ‘디캠프’)의 일대기 다큐멘터리 <디캠프> 제작은 그야말로 ‘우연 같은 필연’에 의해 시작됐다.

종로 거리에서 길을 찾던 후손들이
목동으로 안내되다

지난 해 9월 종로5가 한 복판에서 헤매고 있던 한 무리의 미국인들에게 호기심 많은 목사 한 분이 다가갔고, 놀랍게도 그들은 CBS 초대 사장 오토 디캠프의 후손들이었다. 창사 70주년을 맞은 CBS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은 목동으로 안내됐고, 종로에 있는 줄 알고 찾아 헤매던 CBS 사옥을 48년 만에 방문했다. 차남 짐 디캠프 목사를 창사 70주년 기념식에 초대했고, 계엄의 밤이 막 지난 12월 4일 입국한 그와 함께 오토 디캠프를 기억하는 다큐멘터리의 촬영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시작됐다.

2024년 9월, CBS 사옥을 방문한 오토 디캠프의 후손들

서대문형무소에서의 다큐멘터리 촬영 (2024년 12월)

일제의 감옥, 종로의 방송국,
4,19 혁명의 거리, 그리고 다시 미국...
파란만장한 삶

미국인 내한 선교사의 아들로 1911년 서울 종로구 홍파동에서 태어난 디캠프는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38년 미 북장로교 선교사 신분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해지던 1941년 1월, 디캠프는 한국인 신자 집에 설치된 가정 신사(神社)인 가미다나(神棚) 철거를 감행하고 체포돼 사상범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서대문형무소 앞에 선 디캠프 (1948년)

디캠프는 법정에서 “한국인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내가 직접 철거했다”고 진술했고, 미국인 선교사가 구속된 사태에 미 대사관과 국무부는 분주하게 대응했다. 1941년 7월 일제 하 경성복심법원은 ‘10개월의 노동 징역형,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고 디캠프는 미국으로 추방됐다.


자신에게 고난을 안겨준 땅이었지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는, ‘어떻게 하면 빨리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지’ 북장로교 선교부에 끊임없이 질문했고 미 육군 군목으로 3년간 복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8년, 미국교회와 한국기독교연합회(NCCK)가 함께 라디오 방송국을 세우는 일의 책임자로 7년 만에 꿈에 그리던 고향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한국전쟁 발발로 방송장비가 일본 고베항의 창고에 묶이고 전쟁 난민 구호에 나서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54년 12월 15일 오후 6시, 마침내 종로2가 기독교서회 5층 스튜디오에서 호출부호 HLKY,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 CBS의 첫 전파가 쏘아 올려졌다.

초대 CBS 국장 오토 디캠프 (1950년대) 

CBS 인기 드라마 ‘이 생명 다 하도록’ 녹음 현장 (1957년)

기독교방송 CBS의 초대 국장(현 사장) 디캠프는 “듣는 이가 없다면 천사가 마이크를 잡아도 헛되다”며 주파수가 교회 밖에 있는 90%의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도달하기 원했다. 당시 최신식 장비인 LP판을 미국에서 들여와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수정탑>과 <이 생명 다하도록> 같은 드라마 히트작을 연달아 선보였고 CBS 청취자의 70%는 비기독교인이었다. 국영방송 KBS와 경쟁하며 1950년대 ‘라디오 전성시대’를 연 것이다.

4.19 혁명 시위 현장을 생중계하는 CBS 방송부 (1960년)

4.19 특집보도로 정부 표창장을 받는 디캠프 국장 (1960년)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 시기 CBS는 종로2가 사옥 옥상에서 시위대를 바라보며 생생한 현장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다. 혁명 기간 동안 진실 보도에 목말랐던 시민들은 정부의 입장만을 대변하던 국영방송 대신 CBS에 라디오 다이얼을 맞췄다. 정규편성을 중단하고 전 직원을 4.19 특집보도 제작에 동원했고 디캠프 국장 이하 모든 간부가 숙직을 하며 뉴스 제작을 지휘했다. 후에 디캠프는 “4월 혁명을 계기로 CBS의 인기는 급상승했다. 사람들은 기독교방송이기 때문에 진실을 이야기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회고했다.

“내가 할 일을 다 했을 뿐”

1968년, 외국인이 방송사 대표를 맡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박정희 정부의 종용에 디캠프는 국장에서 해임됐다. 정부 입장에서 ‘할 말은 하는’ 미국인 디캠프가 편할 리 없었다. 디캠프가 국장에서 물러났지만 이미 ‘진실을 추구하는 기독교 저널리즘‘의 원칙을 세운 CBS는 1970년대 이후 ‘종로5가 기독교회관’으로 상징되던 민주화, 인권 운동의 흐름에 함께 하며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는 진실 보도의 전통을 이어간다.


임기 정년을 마친 디캠프는 1976년 5월, 김포공항에서 수백 명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49년을 살아온 한국과 이별한다. 그날 아버지에게 심경을 물었던 아들 짐 디캠프는 나지막한 그의 대답을 아직도 기억한다. “짐, 나는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란다.” 한국에 남긴 마지막 고별사였다.

             

다큐멘터리 <디캠프>는 10명의 미디어학자, 교회사학자의 자문을 얻었고, 특히 1930년대부터 작성되어 수백 장에 달하는 디캠프의 서신과 리포트, 미국 국무부 자료와 신문 잡지 기사, 1960년대 CBS 사업보고서 등 자료 확보로 사실성과 신뢰도를 높였다. <디캠프>는 단순히 한 개인과 방송국의 역사가 아닌 한국 선교역사, 방송역사, 사회운동사를 아우르는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하 교회와 선교사들의 대응, 해방 후 한국 방송 현실과 방송선교에 대한 교회의 도전, 민주화 운동에 나선 교회의 움직임과 기독교방송의 관계 등을 담아냈다.

<김현정의뉴스쇼> 제작현장을 찾은 디캠프 후손들 (2024년 12월)

촬영 기간 동안 짐 디캠프 목사의 숙소가 있던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가 이어졌다. 민주주의를 위한 몸짓을 40여 년 만에 직접 목도하며, 1950~70년대 정치적 격동 속에서 CBS를 이끌어가던 아버지 오토 디캠프의 결연한 표정을 떠올리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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