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현장을 찾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한국교계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기독교계 단체인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과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우크라이나 인근 국가인 루마니아에서 물품을 구입한 뒤 우크라이나로 전달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마주한 루마니아로 취재 길에 올랐다.
취재 현장에 가면 그 현장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생동감 있게 영상 카메라에 담아낼 것인지를 늘 고민하게 된다. 이번 출장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피해 나온 난민들의 이야기와 이들을 돕는 이들의 활동, 특히 멀리서 온 한국의 교회들이 우크라이나를 위해 준비한 물품을 전달하는 것 등을 어떻게 영상에 담을지 생각하며 취재지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취재 첫날 루마니아의 북쪽 수체아바(Suceava)시에는 온통 하얀 눈이 내렸다. 근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취재팀과 구호팀 지원을 위해 우크라이나 한재성 선교사님과 카트리샤 자매가 합류했다. 한 선교사님은 최근에 우크라이나에서 피난을 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카트리샤 자매는 한 선교사님의 교회 성도인데 한국어를 전공해 통역을 도와주게 되었다. 여기에 3명의 루마니아 선교사님, 채정기(순복음), 이권칠(합동), 백우진(감리) 선교사님이 우리 취재팀을 도와주셨다. 이렇게 꾸려진 취재진과 한국교회의 구호팀은 구호물품 전달과 취재에 앞서 기도를 드렸다. “주님의 보살핌과 은총이 있기를...”
난민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루마니아 대형 마트에서 생필품, 간식, 가재도구를 구입하고 차에 실었다. 하지만 우리 구호품을 싣기로 한 차가 갑자기 고장이 나는 바람에 내일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변수도 생길 수 있구나... 결국 차가 국경을 넘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루마니아 시레트(Siret) 국경으로 이동해야 했다. 난민들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루마니아 북쪽에 위치한 시레트(Siret)에는 우크라이나와 연결된 도로와 국경 검문소가 있었다. 100여 미터 떨어진 검문소에서 걸어오는 난민의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그들에게서는 피곤함과 아직 남아 있을 가족들을 염려하는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을 표정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았다. 한 여성은 “국경까지 같이 온 남동생은 징집 대상자라 국경을 넘어오지 못해 혼자 넘어왔다”며 걱정하는 눈물을 보였고, 또 한 여성은 “남편이 딸과 함께 국경까지 데려다주고, 자신은 나라를 지키겠다며 다시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15년 동안 의사로 활동했고 앞으로 여기에 남아 의료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일단 피난 왔지만 우크라이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제발 그렇게 될 수 있길 나도 기도하고 있었다.
다음 여정은 의약품을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루마니아 현지 교회 취재였다. 우리는 루마니아 콘스탄차(Constanta)로 이동해 현지 교회(Betel교회)에서 구입했다는 의료 기구 및 약품을 확인하기로 했다. 구입 비용은 한국교회 봉사단이 미리 현지 교회로 보냈다고 했다. 구입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약품을 구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곳 벧엘교회 사모님이 간호사라 많은 양의 약품을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혈압계, 인슐린, 항생제, 응급의약품들을 보면서 우리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의약품을 확인하고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루마니아 남동부 이사체아(Isaccea) 국경에 도착했다. 이곳은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두고 우크라이나와 접해있다. 시레트(Siret) 육로와는 달리 배에 차량을 싣고 피난길에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통해 의약품이 우크라이나로 전달될 것이다. 이곳에서도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오데사에서 온 40대 중년의 한 남성은 4명의 아이들을 모두 차에 태워 올 수 있었다며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폴란드에 있는 동생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비록 우리 취재진은 우크라이나로 직접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루마니아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고 러시아의 폭격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취재 중 만났던 우크라이나 한재성 선교사님의 말이 생각난다. 피난민은 한결같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의 지금의 심정도 피난민과 똑 같다고 했다. ‘망연자실’.. 더 이상 설명할 말이 있을까.
“그들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일주일 만에 전쟁의 참혹함을 보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의 마음을 100분의 1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이웃 국가로 몸을 피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황망한 일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에게는 다시 돌아가길 희망하는 소중한 날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쉬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다짐했던 해외 취재였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길, 간절히 너무나 간절히 바라본다.
재난 현장을 찾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한국교계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기독교계 단체인 한국교회봉사단(한교봉)과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우크라이나 인근 국가인 루마니아에서 물품을 구입한 뒤 우크라이나로 전달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마주한 루마니아로 취재 길에 올랐다.
취재 현장에 가면 그 현장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어떻게 생동감 있게 영상 카메라에 담아낼 것인지를 늘 고민하게 된다. 이번 출장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피해 나온 난민들의 이야기와 이들을 돕는 이들의 활동, 특히 멀리서 온 한국의 교회들이 우크라이나를 위해 준비한 물품을 전달하는 것 등을 어떻게 영상에 담을지 생각하며 취재지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취재 첫날 루마니아의 북쪽 수체아바(Suceava)시에는 온통 하얀 눈이 내렸다. 근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요했다. 취재팀과 구호팀 지원을 위해 우크라이나 한재성 선교사님과 카트리샤 자매가 합류했다. 한 선교사님은 최근에 우크라이나에서 피난을 왔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카트리샤 자매는 한 선교사님의 교회 성도인데 한국어를 전공해 통역을 도와주게 되었다. 여기에 3명의 루마니아 선교사님, 채정기(순복음), 이권칠(합동), 백우진(감리) 선교사님이 우리 취재팀을 도와주셨다. 이렇게 꾸려진 취재진과 한국교회의 구호팀은 구호물품 전달과 취재에 앞서 기도를 드렸다. “주님의 보살핌과 은총이 있기를...”
루마니아 대형 마트에서 생필품, 간식, 가재도구를 구입하고 차에 실었다. 하지만 우리 구호품을 싣기로 한 차가 갑자기 고장이 나는 바람에 내일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변수도 생길 수 있구나... 결국 차가 국경을 넘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루마니아 시레트(Siret) 국경으로 이동해야 했다. 난민들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루마니아 북쪽에 위치한 시레트(Siret)에는 우크라이나와 연결된 도로와 국경 검문소가 있었다. 100여 미터 떨어진 검문소에서 걸어오는 난민의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그들에게서는 피곤함과 아직 남아 있을 가족들을 염려하는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이들을 표정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았다. 한 여성은 “국경까지 같이 온 남동생은 징집 대상자라 국경을 넘어오지 못해 혼자 넘어왔다”며 걱정하는 눈물을 보였고, 또 한 여성은 “남편이 딸과 함께 국경까지 데려다주고, 자신은 나라를 지키겠다며 다시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15년 동안 의사로 활동했고 앞으로 여기에 남아 의료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일단 피난 왔지만 우크라이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제발 그렇게 될 수 있길 나도 기도하고 있었다.
다음 여정은 의약품을 우크라이나로 보내는 루마니아 현지 교회 취재였다. 우리는 루마니아 콘스탄차(Constanta)로 이동해 현지 교회(Betel교회)에서 구입했다는 의료 기구 및 약품을 확인하기로 했다. 구입 비용은 한국교회 봉사단이 미리 현지 교회로 보냈다고 했다. 구입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약품을 구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곳 벧엘교회 사모님이 간호사라 많은 양의 약품을 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혈압계, 인슐린, 항생제, 응급의약품들을 보면서 우리 일행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의약품을 확인하고 4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온 루마니아 남동부 이사체아(Isaccea) 국경에 도착했다. 이곳은 도나우 강을 사이에 두고 우크라이나와 접해있다. 시레트(Siret) 육로와는 달리 배에 차량을 싣고 피난길에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통해 의약품이 우크라이나로 전달될 것이다. 이곳에서도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오데사에서 온 40대 중년의 한 남성은 4명의 아이들을 모두 차에 태워 올 수 있었다며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폴란드에 있는 동생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
비록 우리 취재진은 우크라이나로 직접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루마니아에서도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고 러시아의 폭격은 더 심해졌다고 한다. 취재 중 만났던 우크라이나 한재성 선교사님의 말이 생각난다. 피난민은 한결같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자신의 지금의 심정도 피난민과 똑 같다고 했다. ‘망연자실’.. 더 이상 설명할 말이 있을까.
일주일 만에 전쟁의 참혹함을 보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의 마음을 100분의 1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이웃 국가로 몸을 피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황망한 일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이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에게는 다시 돌아가길 희망하는 소중한 날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쉬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다짐했던 해외 취재였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길, 간절히 너무나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