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들과
함께 만든 25년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꽤 오래전 읽은 작품인데,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네 자매의 운명이 고대를 배경으로 신비롭게 날카롭게 그려진, 무척이나 재미있는 만화였습니다. 저마다의 운명을 지고 태어난 자매들이지만 그 운명이 자기 자신을 어디로 어떻게 이끌어갈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죠. 그래서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삶은 예측불허. 그래서 의미가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그래서 어떤 신분이 되고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알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삶이 이끌어 가는 방향과 세부적인 것은 알지 못한 채 운명에 따라 운명을 거스르며 운명과 발맞춰 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신지혜의 영화음악>에 출연한 배우 조진웅.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이 2월 2일로 25주년을 맞았습니다. 1998년이라는 연도를 돌이켜보니 꽤 오래 짚어봐야 할 만큼 제법 시간이 흘러 버렸군요. 많은 분들이 25주년을 맞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 오셨습니다. 글쎄요. 솔직히 10주년이 되었을 때는 “와, 어느새 10주년이 되었구나. 뿌듯하고 기쁘다.”라는 느낌이었는데 15주년이 되고 20주년을 맞을 때는 오히려 뭔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시간의 무게가 크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 어쩌다 25주년을 맞고 보니 글자 그대로 얼떨떨한 기분이 큽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도 당연히 크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긴 시간을 함께해 준, 눈에 보이지 않는 청취자들의 마음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청취자들의 마음과 응원과 격려가 있었기에 이 시간이 존재하고 이 시간이 지속되어 왔고 여기까지 와 있게 되었구나, 하는 마음이 되었달까요.
앞서 언급한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대사처럼 예측불허인 시간 속에서 한 발 한 발 걸어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새로 배당을 받으면 ‘이번에도 재미있게 해 보자. 이런 코너를 만들어 볼까, 이런 건 어떨까’하고 생각했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한 발 한 발씩 걸어왔기에 지금 이 시간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제작 진행하게 되었을 때 처음부터 누군가가 “너 앞으로 이 프로그램 10년 해야 해”라고 말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같네요. 물론 처음에는 좋아하는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할 수 있어서 기쁘고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겁이 나고 힘겨워지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미래의 시간은 예측불허이기 때문에, 한 발씩 내디딜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쌓여 온 것 같습니다.
<신지혜의 영화음악>에 출연한 배우 박성웅.
돌이켜보면 저는 <신지혜의 영화음악>과 꽤 오래도록 사랑에 빠져 있었네요. 새로 배당을 받으면 어떤 코너를 짤까, 어떻게 구성을 할까, 이것도 재미있겠는데 이런 것도 해 볼까 혼자 신이 났었으니 말입니다. 정말 사랑에 빠진 듯, 연애를 하는 듯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온통 그 사람만 보이잖아요.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곡을 듣고 좋은 책이나 영화를 보면 그 사람이 떠오르듯이 영화를 보면 이 영화와 저 영화를 묶어서 이런 얘기 할 수 있겠다, 싶었고 이 영화음악을 멋지게 듣기 위해서 어떤 코너를 만들까, 어떤 곡들을 앞뒤로 붙일까 생각하게 되고 이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까 고민하는 모든 것이 즐겁고 에너지가 충만해 있었으니까요. 그 때 저의 뇌를 그려본다면 아마 영화, 영화음악이 90 퍼센트는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조금 다르죠. 지금은 그때보다 한 걸음 물러서 있다고 할까. 조금은 관조적이 되었고 조금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오프닝의 내용도 그래서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의 오프닝은 뭔가 조금은 평안하고 조금은 평온하게 호흡을 고르고 가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많이 싣게 됩니다. 세월이 주는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기에 반짝이고 통통 튀는 말보다는 조금은 느리게 조금은 다정하게 말을 걸도록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신지혜의 영화음악>과 함께 대학생활을 보내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은 분들도 꽤 되거든요. 그 오랜 친구들과 아직도 서로 믿을 수 있는, 아직도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한 관계를 맺어 가고 싶죠. 매일 오전 열한시에 만나는 <신지혜의 영화음악>. 생각나면 슬쩍 찾아와 한 숨 고르고 갈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를 다시 한 번 바라봅니다.
25년을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청취자들과 함께 만든 25년
<아르미안의 네 딸들>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꽤 오래전 읽은 작품인데,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네 자매의 운명이 고대를 배경으로 신비롭게 날카롭게 그려진, 무척이나 재미있는 만화였습니다. 저마다의 운명을 지고 태어난 자매들이지만 그 운명이 자기 자신을 어디로 어떻게 이끌어갈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죠. 그래서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삶은 예측불허. 그래서 의미가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그래서 어떤 신분이 되고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지 알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삶이 이끌어 가는 방향과 세부적인 것은 알지 못한 채 운명에 따라 운명을 거스르며 운명과 발맞춰 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신지혜의 영화음악>에 출연한 배우 조진웅.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이 2월 2일로 25주년을 맞았습니다. 1998년이라는 연도를 돌이켜보니 꽤 오래 짚어봐야 할 만큼 제법 시간이 흘러 버렸군요. 많은 분들이 25주년을 맞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 오셨습니다. 글쎄요. 솔직히 10주년이 되었을 때는 “와, 어느새 10주년이 되었구나. 뿌듯하고 기쁘다.”라는 느낌이었는데 15주년이 되고 20주년을 맞을 때는 오히려 뭔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시간의 무게가 크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와중, 어쩌다 25주년을 맞고 보니 글자 그대로 얼떨떨한 기분이 큽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도 당연히 크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긴 시간을 함께해 준, 눈에 보이지 않는 청취자들의 마음이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청취자들의 마음과 응원과 격려가 있었기에 이 시간이 존재하고 이 시간이 지속되어 왔고 여기까지 와 있게 되었구나, 하는 마음이 되었달까요.
앞서 언급한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대사처럼 예측불허인 시간 속에서 한 발 한 발 걸어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새로 배당을 받으면 ‘이번에도 재미있게 해 보자. 이런 코너를 만들어 볼까, 이런 건 어떨까’하고 생각했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한 발 한 발씩 걸어왔기에 지금 이 시간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제작 진행하게 되었을 때 처음부터 누군가가 “너 앞으로 이 프로그램 10년 해야 해”라고 말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같네요. 물론 처음에는 좋아하는 영화음악 프로그램을 할 수 있어서 기쁘고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10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는 순간부터 겁이 나고 힘겨워지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미래의 시간은 예측불허이기 때문에, 한 발씩 내디딜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쌓여 온 것 같습니다.
<신지혜의 영화음악>에 출연한 배우 박성웅.
돌이켜보면 저는 <신지혜의 영화음악>과 꽤 오래도록 사랑에 빠져 있었네요. 새로 배당을 받으면 어떤 코너를 짤까, 어떻게 구성을 할까, 이것도 재미있겠는데 이런 것도 해 볼까 혼자 신이 났었으니 말입니다. 정말 사랑에 빠진 듯, 연애를 하는 듯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온통 그 사람만 보이잖아요. 좋은 것을 보고 좋은 곡을 듣고 좋은 책이나 영화를 보면 그 사람이 떠오르듯이 영화를 보면 이 영화와 저 영화를 묶어서 이런 얘기 할 수 있겠다, 싶었고 이 영화음악을 멋지게 듣기 위해서 어떤 코너를 만들까, 어떤 곡들을 앞뒤로 붙일까 생각하게 되고 이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할까 고민하는 모든 것이 즐겁고 에너지가 충만해 있었으니까요. 그 때 저의 뇌를 그려본다면 아마 영화, 영화음악이 90 퍼센트는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조금 다르죠. 지금은 그때보다 한 걸음 물러서 있다고 할까. 조금은 관조적이 되었고 조금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오프닝의 내용도 그래서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의 오프닝은 뭔가 조금은 평안하고 조금은 평온하게 호흡을 고르고 가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많이 싣게 됩니다. 세월이 주는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기에 반짝이고 통통 튀는 말보다는 조금은 느리게 조금은 다정하게 말을 걸도록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신지혜의 영화음악>과 함께 대학생활을 보내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은 분들도 꽤 되거든요. 그 오랜 친구들과 아직도 서로 믿을 수 있는, 아직도 함께 하는 시간이 소중한 관계를 맺어 가고 싶죠. 매일 오전 열한시에 만나는 <신지혜의 영화음악>. 생각나면 슬쩍 찾아와 한 숨 고르고 갈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를 다시 한 번 바라봅니다.
25년을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